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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 촬영을 생명으로 하면서 셔터 찬스를 절대 우선주의로 했다. 때문에 초점이 맞고 안맞고, 구도나 노출의 과부족 같은 기술적인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즉, 대상과 사진기를 적극적으로 결부시키는 데에 그의 독자적인 영상미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클라인
사진계의 반항아이자 이방인이었던 윌리엄 클라인
윌리엄 클라인은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사진가의 한 사람으로 그가 활동한 영역은 사진에만 그치지 않고 그림, 조각, 무대 미술, 영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서는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넘나들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다. 클라인은 사회학도였으나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18세 때 군에 입대하여 유럽전선에 배속되었고, 중동전에 참전했다가 파리에서 제대하였다.
윌리엄 클라인은 평소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에게 사사했는데 이때 그의 스승인 레제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대 초부터 추상작업을 위해서 사진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청년 화가 시절 윌리엄 클라인은 인상파, 세잔, 피카소를 좋아했다. 그는 레제의 작업에서 현대의 차가운 기술 공학을 받아들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기의 조형적 건축에서는 그 차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진 분야에서는 농업안정국과 루이스 하인, 특히 워커 에반스의 직설적인 도큐멘트를 좋아했다. 그러나 50년대 유럽 사진의 감정적, 시적 조류는 좋아하지 않았다.(이 대목에서 나는 윌리엄 클라인이 전후 미국의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던 프래그머티즘적인 요소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윌리엄 클라인이 처음 사진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회화 작업의 연장으로 추상적 사진을 시도했는데 나중에 이 작품들을 모아 뉴욕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는 결국 사진가가 되었고, 사진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사진 작업에만 시종일관 매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그>지에서 활약하는 패션 사진가이자, 영화 <지하철의 아이>에 작품이 등장할 만큼 전위적인 화가였고, 미술 디자인 잡지 <돔스>의 표지 디자인을 했고, 개인영화도 몇 편 만들었던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조각, 무대미술 등등 자기 자신과 자기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했다.
그의 재능은 시각적인 표현이 미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일종의 종합예술가였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나 스위스 등에서 활약하는 유럽의 현대예술가로서(즉, 미국의 이방인으로서) 고향인 인공의 도시 뉴욕을 촬영했다. 그는 파리에서 8년만인 1955년에 뉴욕으로 돌아와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에게서 물려받은 라이카 카메라를 가지고 뉴욕 거리를 찍었다. 그는 라이카로 작업한 사진들을 선별해 1956년 파리에서 프랑스 사진가인 크리스 마커의 도움으로 쇠유 출판사에서 <New York>이라는 작품집을 프랑스어판과 영어판으로 출판했다. 그의 첫 사진집 <New York>은 출판과 함께 찬사와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
Dance in Brooklyn. 1955
Stranger in NewYork, 윌리엄 클라인
윌리엄 클라인의 작품들은 한눈에 보더라도 단도직입적이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작품들을 미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처음 사진이 등장할 무렵 회화 작가들은 사진이 현실을 재현하는데 좀더 우수한 매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에 따라 겪어야 할 혼란까지 익숙해지는데는 시간이 좀더 걸렸다. 사진 역시 비슷한 길을 겪게 된다. 그것은 TV라는 매체의 등장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매체로 여겨졌던 사진과 그 정신에 입각한 포토 저널리즘은 TV의 등장과 함께 그 위상에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마가렛 버크 화이트 편 참조) TV의 놀라운 속보성과 영상매체로서의 생생한 현실감은 그때까지 가장 충실한 현실 재현 매체로서 사진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그 결과 많은 포토 저널리스트들이 좀 더 극적인 영상을 연출하기 위해 애썼고, 그럴수록 현실은 사진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가 현실의 진실한 사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도가 담긴 변형이라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여겨지던 기록사진과 예술사진도 더 이상 다른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클라인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이 출발한 위치가 바로 거기였다. 로버트 프랭크와 윌리엄 클라인의 작업들은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작품 세계가 다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까닭도 그것이었다. 로버트 프랭크와 윌리엄 클라인은 사진에 있어서 여러 이론들을 개입시키지 않고, 오직 사진 자체만을 문제삼게 했다. 그들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개성은 판이하게 달랐으나 사진을 각 작가의 삶과 뗄 수 없는 직접적인 체험에 밀착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그의 이런 사진 형식은 윌리엄 클라인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의 선배 사진작가 격인 위지(아더 펠리그)는 주로 도시에서 벌어지는 센세이션한 사건들을 현장에 도착해서 생생하게 촬영하고 누구보다 먼저 현상하고 인화하여 언론사에 팔아 넘겨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위지의 자유분방하고 사건 현장을 직설적으로 담아낸 이미지들은 불손하며 심지어는 천박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랄했다. 그의 직설적이고 신랄한 이미지들은 다이안 아버스를 거쳐 윌리엄 클라인에게 이어진다.
도시가 지닌 음험한 미소를 그려낸 화가 - 윌리엄 클라인
로버트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윌리엄 클라인도 "인생만큼이나 불가해한 사진을 만드는데"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프랭크가 형식을 무시하는 듯이 보인다면, 클라인은 시각적 효과를 확대시킨다. 프랭크가 의미의 위계를 파괴한다면, 클라인은 기법의 규칙을 파괴한다. 그는 미국 출생이었으나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였고, 유럽의 현대 예술가로서 자신의 고향인 인공의 도시 뉴욕을 촬영했다. 그는 여러 기호들로 치장되어 있는 도시의 모습을 담아냈는데 그것들은 주로 광고와 사인보드, 숫자, 이름, 빛, 인물 등등의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것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집 <뉴욕>에 '뉴욕의 멋잇는 생활, 도취, 목격, 야단법석'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는 "전적으로 통속적인 것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일상의 공격성을 거친 입자와 극적인 콘트라스트, 흔들리는 이미지로 일면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서 가장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인간의 이미지들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그동안 우리들이 포토저널리즘을 통해 익히 보아 왔던 - <라이프>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의 상징적인 창간사에 담겨있듯 -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랄지,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없거나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Broadway and 103rd Street New York. 1954-55
도시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의 하나로서 존재한다. 윌리엄 클라인의 시선은 악의로 가득찼고, 악마적이고 허무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이미지들을 토막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들이 받게 되는 충격은 악의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적나라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인간을 도시에 갇힌 사물처럼 표현해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오히려 적나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도시의 한 복판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도시의 일상이다. 분명 윌리엄 클라인의 작품은 통속적이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기법들은 악의적으로 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그것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적나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윌리엄 클라인의 작품이 작품 그 자체로서는 포토저널리즘이 지니고 있는 리얼리즘의 미덕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시각적 이미지들을 수용하는 수용자들의 심리 안에서는 일정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용어화해본다면 '심리적 리얼리즘'인 셈이다.
전후의 현대 - 회의에 빠진 인간과 사진
나는 상당히 고의적으로 실제 있었던 것을 반대로 뒤집었다. 피사체의 화면상의 위치 조절을 무시하고, 카메라를 우연과 우발적 사건에 맡기면서, 사진의 이미지가 해방되리라고 생각했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다.… 카메라에서는 아직 활용되지 않은 숱한 가능성이 있다. 바로 여기에 사진이 존재한다. 카메라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다. 카메라를 도와주어야 한다.
1·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럽 경제는 마샬 플랜 등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융성 속에 급속하게 복구되어 갔다. 많은 식민지 민족들이 독립하는 활기 속에 윌리엄 클라인이 돌아온 뉴욕과 미국은 한국 전쟁 후 최대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시는 급속히 팽창했고, 메트로폴리스는 메갈로폴리스로 확장되었다. 전쟁이라는 문명(civilization) - 문명이란 말은 도시(city)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 즉, 도시를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가 지나간 뒤 도시는 다시 융성하고 국가는 도시의 건설을 장려했다. 전쟁이 비록 비인간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전쟁의 수행자도, 그에 대한 피해자도 역시 인간이었기 때문에 양차 대전 기간 동안 예술, 특히 20세기 초엽 전성기를 맞이하는 사진 예술의 주요 관심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Gun 2, Little Italy. 1955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반기를 들고 사진이 하나의 조형 의지를 지닐 수 있는 매체라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의 중요한 사진가로서 윌리엄 클라인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조형 의지를 새길 수 없으리만큼 수동적이며 무익하게 여겨지던 파인더의 이미지가 이제부터는 뜻밖의 창작이 샘솟아나는 원천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창작과정의 일반적 흐름이 역전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뉴욕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시각효과를 극대화하는 표현기법을 사용했다. 그가 새로운 사진의 형식과 의미를 담아 만들어 낸 작품집 <New York>은 미국의 현대 물질 문명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맹렬한 속도 - '속도(velocity)'라는 말, 그 자체로는 빠르다(fast), 느리다(slow)를 보여주는 단어가 아님에도 현대인은 속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속도(speed)' 혹은 '빠르다(fast)'를 연상한다. 이것은 현대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간 개념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로 질주하는 도시와 물질문명, 그리고 이를 뒤따르지 못하고, 고도의 조직화에 의하여 획일화된 생활과 사고 속에 개성이 상실되어 가는 대중사회(mass society)의 인간 소외를 표현한 것이다.
윌리엄 클라인은 로버트 프랭크와 더불어 영상사진의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현대사진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로버트 프랭크가 자신의 내면적인 자의식을 냉철하게 표현한 것과 달리 클라인은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터뜨리며 대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을 통해 그는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집에는 담긴 풍경들은 일반적인 풍경이 아니라 마치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풍경, 모두가 제각기 개성을 뽐내고 심지어는 광기를 드러내며 자기 주장을 펼치는 듯이 보이지만 마네킨처럼 획일화되고, 물질화된 사람들로 그득하다. 그의 사진 표현들은 역동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냄새가 감도는 풍경이 영상화되어 있다.
그의 이런 다큐멘터리 사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이 된 미국 사회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미국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고, 인간 소외와 인간성 상실을 감지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사진의 표현으로는 영상을 발견했고, 사진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메시지로는 인간을 탐구했다.
그는 <뉴욕>을 발간한 뒤, 1959년에는 제2작품집 <Rome>을 출판했으며 계속해 1964년에는 <Mosoow>와 <Tokyo>를 간행했고, 1965년부터는 영화 제작에 손대어 각본을 쓰거나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모스크바>에 이르면서 충격적인 수법에 의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고 사색적인 사실주의로 돌아왔다. 어찌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리얼리즘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윌리엄 클라인의 작품들은 언제나 현실 그 자체 속에 스스로 몰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