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진의 선승(Zen master)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Capa said to me: `Don't keep the label of a surrealist photographer.
Be a photojournalist. If not you will fall into mannerism.
Keep surrealism in your little heart, my dear.
Don't fidget. Get moving!' This advice enlarged my field of vision."
- Henri Cartier Bresson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 Henri Cartier Bresson, 프랑스, 1908 ~2004 )

Henri Cartier Bresson, 1908 ~ 2004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말하면서 아마도 그의 사진집 제목으로부터 유래된 <결정적 순간 Image a La Sauvett, The Decisive moment>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띠에 브레송은 단순히 <결정적 순간>으로 응축되기에는 그 폭이 너무나 큰 작가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는 사진 예술을 통해 철학(哲學)한 인물이자 후대의 많은 사진 작가들에게 있어 숱한 영감과 감화를 준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어떤 말이나 글로 전했다기 보다는 그의 사진작업들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진 기자이기도 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Image의 추구

까르띠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까르띠에 브레송은 어려서부터 미술을 비롯해 당대의 여러 예술적 경향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조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후일 그가 사진 작업을 통해 평생 이미지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게 되는 첫 출발점이었다. 그는 처음엔 화가가 될 생각으로 1927년부터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자크 에밀 블랑슈, 앙드레 로트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초현실파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테리아드 출판사를 드나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형상(image)의 엄격성에 집중된다. 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구입한 그는 멕시코, 미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폴 스트랜드 곁에서 영화를 배우고, 1932년에는 줄리안 레비 화랑에서 처녀전을 열기도 한다. 또 프랑스로 귀향한 뒤로 장 르누아르와 자크 베케르 감독과 함께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 무렵이던 1930년 마르세이유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평생 라이카 카메라만을 애용했다. 당시는 중형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가 라이카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르포르타주 사진가로 활동한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1932년부터 2년 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었다. <폐허에서 노는 아이들>은 이때에 그가 찍은 대표작이다. 1936년 봄, 그는 파리의 어느 신문사 사진부에 들어가기 위해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낙방하고 말았다. 이때 헝가리 출신의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세이무어도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그날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날의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그들은 후일 <MAGNUM>이란 사진작가들의 연합통신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역시 프랑스군에 종군하여 영화사진반에 참가했으나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1943년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이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고, 이때부터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전쟁 후에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uge), 루오(Georges Rouault) 등을 촬영하며 예술가의 내면의 깊이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것인가에 노력을 쏟았다.

종전 후인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그의 작품전을 통해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이 중심이 되어 <매그넘MAGNUM>을 설립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진기자들의 불안한 지위와 특정 매체(신문사와 잡지)의 틀에 박힌 편집 방향과 포맷으로부터 벗어나 사진가의 개인의 관심과 개성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을 보장받기 위해 창립된 사진 에이전시가 바로 <매그넘>이다.(그러나 이런 매그넘의 경향과 탄생이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름인 매그넘MAGNUM이 '크다'라는 의미의 희랍어로 위대한 사진가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이는 동시에 대형연발권총을 의미하는 영어‘Magnum’의 동음이의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탄생이 처음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었고, 근대성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매그넘은 닫힌 서구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매그넘과 인간가족전>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어쨌든 경제적 착취와 기존 매체들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설립된 국제보도사진가 집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진통신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설립 이듬해 뉴욕에도 사무실을 개설했다.

매그넘의 주요사진가이자 주요 설립자 중 하나였던 카파는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고, 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데이비드 세이무어는 1956년 수에즈 상륙작전 때 사망했고, 베르너 비쇼프는 1954년 페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매그넘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후로도 주로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신세대 사진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더욱 규모를 키워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레송은 그후 3년 동안 중공,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이란 등으로 여행하여 동양 민족의 생활과 그 풍토를 촬영하였다. 그 사진들은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후의 민중의 혼란 상태와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태 등을 박진감 있게 표현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첫번째 대형 사진집은 <재빠른 영상들>(1952)이다. 거의 20여 년간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탐방기자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제 다시금 그림으로 돌아와 있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현실과 시각의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 후 또다시 소련을 여행하며 공산주의 정권 아래의 민중의 일상생활 모습을 촬영하고 발표하는 한편 1955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중량감있는 사진 표현으로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만약 그가 단지 그냥 한 명의 충실한 보도사진가라면 그가 지금처럼 유명한 사진작가로 추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보다 한발 더 나갔기 때문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천재성은 매그넘의 모험을 따랐으나 자기 자신은 그보다 더 멀리 앞서 나갔다.  그러나 1933년의 스페인 여행에서 그는 본격적인 르포르타주 사진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두뇌를 써서 사공한 이미지보다 "결정적 순간"의 탐구에 훨씬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자의 사진찍는 행위를 가장 완벽하게 정의했던 인물이 바로 까르띠에 브레송이다.

프랑스 파리, 생-라자르 역 후문, 1932

프랑스 파리, 생-라자르 역 후문, 1932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다." 현실의 어떤 치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또 형태들이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미지에서는 다소 차가우면서도 섬세한 멋이 나며, 그것은 찬양도 비판도 아닌, 단지 현실을 꼼꼼히 분해하고 거기에 어떤 스타일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르포르타주는 승리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사진가와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념적 체제 사이의 분열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불과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가장 생생한(거친) 사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현 욕구에 제동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연출하지 않고, 트리밍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삼았다. 1952년 출판한 그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미학을 권두에 밝혀두고 있다. 그는 촬영 대상의 움직임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포착했다. 이를테면 그는 피사체에게 '아, 좋아요. 잠깐 거기 멈춰 서세요.'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는, 촬영하는 동안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되며, 실제의 자연광을 존중하지 않고서 플래시 라이트의 도움을 받으면 어떤 사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 1959

이탈리아 로마, 1959

그는 사진찍히는 사람이 카메라나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복잡한 장비나 반사판 등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하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여러 기자재들은 멋진 작품을 만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현상, 인화 과정에서의 조작과 사진을 트리밍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또한 그는 카메라의 앵글의 변화들을 통해 강조를 주고 주의를 환기하는 형태의 촬영에 반했고, 광각이나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것도 되도록 멀리했다. 그는 또한 칼라 사진에 대하여, 흑백사진에 의해 포착되는 삶의 움직임과 성취감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