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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his short lifetime he photographed five wars.
그는 짧은 생애동안 다섯 차례의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1954)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1954)

우리는 전쟁 사진을 말할 때 로버트 카파를 빼놓고는 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카파 이전에도 많은 전쟁 사진가들(로저 팬톤, 알렉산더 가드너 등)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뛰어난 많은 전쟁 사진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로버트 카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짧은 생애 동안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으며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를 누비며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전쟁 사진이라고 하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 그것이다.

사진의 발명이래 전쟁은 매스미디어의 가장 사랑받는 테마 중 하나였다. 대중은 전쟁 이야기를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에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매스 미디어, 그리고 전시(戰時)에 대중을 통제하고 전쟁에의 의지를 북돋기 위해 지배 계급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전쟁을 홍보할 필요를 느꼈다. 이 양자의 이익이 결합하여 전쟁을 촬영한 보도 사진은 많은 수요를 필요로 했고, 그들의 편의에 따라 사용되기도 했다. 앞서 말한 로저 팬톤(1819-1869)의 경우 그의 본업은 변호사였고,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신사였다.

그가 촬영한 크리미아 전쟁은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이 많은 사상자를 발생케 한 전쟁이었다. 그랬음에도 그가 촬영한 사진들에는 죽은 병사의 시신 한 구 나오지 않는다.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주름잡힌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찻잔을 들고 있는 전형적인 영국의 귀족 장교들만 촬영되어 있었다. 물론 노출이 10초에서 1분이나 걸리던 당시의 습판 콜로디온 감광 사진으로는 격렬한 전투장면을 촬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지나간 뒤의 풍경은 충분히 촬영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장면을 찍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장교들의 기념 사진 위주로 촬영한 데에는 분명 당시 그를 후원하고 있던 지배계급의 이해가 달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에게 내건 조건은 이랬다. "사체가 나오지 않을 것!"

그 이후 사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언론 매체에 보도되는 대개의 사진들은 자국의 승리를 찬양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대중에게 쇼크를 줄 수 있는 그것이 분명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가차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의 정점에 서 있던 사진가가 바로 로버트 카파이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어느날 갑자기 불려나와 이름도 모르는 언덕과 골짜기, 초원에서 사라져가는 현장을 지켰고 그들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 소개된 그의 책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바이블이 되었으며 그의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종군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이제 종군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다.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다.

영원한 이방인이자 국외인(局外人)이었던 로버트 카파의 생애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점 중 한 가지는 그가 평생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흘러든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그의 생활은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삶을 살았다.

(Robert Capa and Gerda Taro) - photo by Fred Stein

(Robert Capa and Gerda Taro) - photo by Fred Stein

그는 스페인 최전방의 참호에서 혹은 적진 깊숙이 뛰어드는 병사들과 함께 했다. 그는 단순히 보도사진가로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회고록인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를 보더라도 그가 스페인 내란 당시 인민전선파에 대해서 정치적인 지지의 입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 내란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지식인들의 절대 다수가 인민전선파를 지지했으며 실제로 의용군을 결성해 참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머나먼 동양(일본)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멀리 스페인까지 날아와 인민전선파를 지원해 의용군에 참전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스페인 내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심정적으로 공산주의보다는 차라리 파시스트들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파시스트였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프랑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과 연인 겔다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1936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1936

로버트 카파란 이름이 마치 종군기자 혹은 전쟁 사진 전문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진의 주된 소재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었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이 해에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스페인 내란에서 자신의 아내 겔다를 잃고 만다. 그와 겔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겔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겔다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겔다는 빌드락, 장 르느와르, 피카소, 아라공, 말로, 니생 등에 의해 정성껏 장례를 치뤄 주었지만 겔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평생 전쟁터를 떠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버트 카파를 덮친 다섯 차례의 전쟁

스페인 내란을 필두로 그는 1938년에 일어난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 참상과 비탄에 빠진 중국인들의 모습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카파는 그의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되어 카메라조차 뺏길 형편에 처한다. 그러던 중 <커리어즈>에 의해 채용되면서 극적으로 종군기자에 복귀하게 되는 행운을 만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The landing at Normandy, 1944.

노르망디 상륙작전 The landing at Normandy, 1944.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그때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진에서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45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그는 이 무렵 존 스타인 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간다.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 베트남간의)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로버트 카파의 죽음과 베트남 전쟁

로버트 카파는 전쟁사진을 단순히 보도하는 입장에서만 촬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그는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대신에 인간의 내면 세계를 전쟁이란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급박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평상시 자신의 가식된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로버트 카파는 촬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관찰자적, 보도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기록성을 위한 사진이 아닌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가자로써 급박한 상황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카파의 사진이 지니고 있는 포토저널리즘의 한계는 베트남전을 통해 드러난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라이프>와 같은 사진잡지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었다. 이런 잡지들은 카파와 같은 종군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필요했고, 종군 기자들은 그들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필요로 했다. 자유와 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건 이런 잡지들은 먼 발치에서 찍힌 전장보다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찍힌 사진들을 원했고,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질수록 호응을 얻었다. 카파가 그토록 대중적인 인기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카파와 포토저널리즘이 그토록 옹호하려고 애썼던 자유와 휴머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붕괴되어 간다. 제국주의의 본질이 바뀌지 않은 채 자유와 휴머니즘이 마치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주장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카파로 상징되는 포토저널리즘의 영웅 신화도 서서히 변질되어 간다. 이제 사람들은 거실에 앉아 전쟁터의 생생한 화면을 TV를 통해 지켜보게 된다. 이제 전쟁터는 관객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원형경기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잠시 TV를 넋놓고 바라보다 다시 낄낄거리며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포토저널리즘이 애초에 전달하고자 하던 메시지는 점점 더 사라지고, 매체들은 더욱더 잔인하고 말초적인 장면을 포토저널리스트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TV를 통해 전쟁을 생중계로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 '노출이 10초에서 1분이나 걸리던 시대의 습판 콜로디온 감광 사진' 시절보다 전쟁을 좀더 잘 알 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우리가 보도를 통해 보고 듣는 전쟁은 언제나 그만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 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는 종군기자들의 인류애에 불타는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나머지는 당신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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