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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심상(心像)을 가졌을 때에는
말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고, 너 자신을 분석하지도 말며,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말라.

로베르 드와노 ( Robert Doisneau, 1912~1994 )

로베르 드와노 ( Robert Doisneau, 1912~1994 )

그는 다른 사진작가들처럼 유명 인물들을 대상으로 포트레이트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주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는 외국으로 촬영 여행을 가는 경우도 거의 없었을 정도로 파리의 일상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그는 파리지엔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인생의 향기가 담긴 단편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영상화하는 데 매달렸다. 그의 이런 작품들의 대부분은 유쾌한 유우머와 페이소스가 담긴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뿍 담겨 있는 것들이었다.

혹시 직접 카메라를 들고서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를 찍어보려고 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 안으로 들어 온 애완 동물을 바라볼 때 그들이 그냥 육안으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말 못하는 짐승도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긴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카메라를 들이댈 때 보이는 반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와 흡사하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인물 사진의 경우엔 피사체가 되는 인물과 카메라를 손에 쥔 사람 사이의 심리적 관계가 그만큼 가까워야 피사체에 대해 거부감 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만큼 자연스러운 사진이 담겨 나올 수 있다. 로베르 드와노는 파리지엔을 사랑했고, 파리지엔들 역시 그 어떤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들보다 로베르 드와노를 사랑했다.


그는 1912년 프랑스 파리 교외의 쟝띠에서 태어났다. 1926년부터 4년동안 파리 에스띠엔느 학교에서 석판 인쇄술을 배우고 졸업할 무렵에는 인쇄조각사 자격증을 얻었다. 학교를 마친  1930년에는 제약회사의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그는 이때 포스터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32년 그의 포토 스토리가 잡지사에 팔리면서 그는 사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드와노는 사진가 앙드레 비뇨의 조수로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의 길로 들어선다.

비뇨 밑에서 조수 생활을 하다가 1934년부터 그는 르노 자동차의 사진부에 취직하였으나 잦은 지각 때문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에 보병으로 징집되었으나,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항독 지하운동에 가담한다. 그는 이때 예전에 익혔던 석판 인쇄술과 사진술로 레지스탕스 동지들을 위해 가짜 여권이나 신분증명서 등을 위조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파리 해방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드와노는 사진작가로서 프리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쟁 후 그의 사진 세계는 더 널리 알려지며 특히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파리 시내를 오가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찍었다.

그는 산젤만에 있는 <카페 드 프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에는 실존주의자들을 비롯해서 무명의 시인, 화가, 그리고 노동자나 국적불명의 흑인들이 넘쳐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파리지엔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고, 격한 정치 토론이나 샹송을 부르고 한데 어울려 떠들고 사랑을 나누었다. 드와노는 이곳을 오랫동안 드나들며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곳 사람들도 드와노가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그들은 저마다 드와노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카메라에 모델이 되었다.

로베르 드와노는 한때 목숨을 걸고 나찌 독일에 대항해 싸웠지만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시사 사진 같은 것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작은 행운에도 행복을 느끼는 서민들의 모습을 사랑했고 그의 관심도 오직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나 명성을 얻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그는 항상 곤궁했고, 변변한 암실조차 갖추지 못해 공동화장실을 암실 대신에 사용하곤 했다. 그가 화장실을 암실로 사용하고 있는 심야의 시간에 누군가 용변을 보려고 그의 암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역시 불편함을 느끼긴 했겠지만 이런 불편에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1956년 사진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에인 <니에프스>상을 수상했다. 그렇다고 그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상을 받은 이후에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살았다.

로베르 드와노의 사진이 카페에 걸려있는 진짜 이유?

친구들에게 사진작가. '로베르 드와노'를 아느냐고 하면 아는 친구가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사진 <키스, 시청 앞 광장> 같은 사진을 보여주면 갑자기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아마 아는 척을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만큼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친숙한 탓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팬시점의 사진엽서에서, 카페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액자에서, 벽걸이용 소품들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와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은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사진들이 카페 벽면에 걸려 있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Le Baiser de l'Hotel de Ville, Paris, 1950 <키스, 시청앞광장>

Le Baiser de l'Hotel de Ville, Paris, 1950 <키스, 시청앞광장>

예전에 친구 중 하나가 괴상한 이름의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음, <이발소 그림 전시회>였던가? 하는 것인데 <이발소 그림>이란 말이 이제는 아주 흔해졌지만 당시로서는 <이발소 그림>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이 글을 읽는 여성분들은 혹시 이발소에 안 가보셨을 수도 있지만, 대충 다들 한 번은 보았을 것이므로) 이발소에 가면 벽에 암퇘지가 돼지젖 16개(실제로 16개인지는 잘 모르겠음)를 훌렁 까놓고 피그(pig)새끼들에게 젖먹이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 혹은 밀레의 만종, 물레방앗간 같은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말한다.

굳이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이니, 키치(kitch)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할 필요없이 우리네 식으로 말하자면 '민화(民畵)'의 현대적 복원이다.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서 민중의 삶이란 것은 다들 고단하고, 피곤한 것이다. 그런 삶의 일부를 드러내고 위안을 주는 그림이나 사진의 필요성도 항상 있어 왔다. 밀레의 만종이 이발소에 걸려있다고 해서 <만종>의 원본이 주는 감동과 작품의 권위가 조금도 줄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로베르 드와노의 사진이 카페에 걸려 있다고 해서 그의 사진이 상업적인 의도로 찍힌 작품으로 오인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재치를 감싸고 있는 시민들의 생활감정은 진실의 밀도가 깊기 때문에 지적인 날카로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하나의 여운으로 가라앉아 있다. 대상에 대한 희극적인 처리는 자칫 잘못하면 대상을 희화화하여 개인의 사생활이나 감정을 다치기 쉬우나 그의 사진은 대상에 대한 친근감과 애정의 눈길로 인해 포근하고 밝으며 긍정적이다. 민화란 것이 말 그대로 민중에 의해 민중의 요구로 그려진 미의식과 정감을 가감없이 드러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사진 역시 그가 원하건 원치 않았건 서민들이 요구하는 미의식과 정감을 가식없이 표현해 나간 진실한 사진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베르 드와노의 작품 세계

로베르 드와노의 작품 세계는 평범한 생활 속의 가벼운 유머와 풍자의 발견이다. 어차피 사진이란 예술이 무(無)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촬영함으로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물론 이 말은 사진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드와노의 사진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물론 파리에서의 일이지만)들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특히 그의 사진이 탁월한 점은 그의 사진이 제삼자로 뷰파인더 뒤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와 한 통속이 된다는 점이다.(때로는 개와 한 통속이 되기도 한다.<Fox terrier on the Pont des Arts, 1953>)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일상 중 한 장면을 드러내면서도 시대적 풍경이라기 보다는 인간 본연의 심리와 사회적 풍속을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information scolaire 1956

information scolaire 1956

드와노의 작품을 보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때의 미소는 터져나오는 것도 아니고 쏟아지는 것도 아닌 가볍게 솟아나는 것이다. 그는 지적인 날카로움이나 냉정한 시선이 아니라 로베르 드와노라는 한 인간의 정신적인 깊이와 그의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포근함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정감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드와노의 작품들은 재치가 빠지기 쉬운 경박함, 시선의 날카로움을 벗어나 등장 인물들의 심리적 반응을 포착한다.

그의 지성적인 재치가 드러나는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시선의 처리인데, 등장인물의 저마다의 심리적 반응을 결정적인 순간의 완전한 시선의 일치를 모색함으로써 사진의 완벽성을 기하고 있다. 이러한 재치를 감싸고 있는 시민들의 생활감정은 진실의 밀도가 깊기 때문에 지적인 날카로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하나의 여운으로 가라앉아 있다. 대상에 대한 희극적인 처리는 자칫 잘못하면 대상을 희화화하여 개인의 사생활이나 감정을 다치기 쉬우나 그의 사진은 대상에 대한 친근감과 애정의 눈길로 인해 포근하고 밝으며 긍정적이다.

로베르 드와노는 그가 태어난 문화적 배경이나 활동시기 그리고 기록성을 앞세우는 사진형식에 있어서 까르띠에-브레송이나 브랏사이 등과 같은 시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진가이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드와노는 생활속에서 밝은 유머와 풍자를 추구하는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사진은 축축한 가로, 외로운 가스등, 울퉁불퉁한 보도 위로 진주 빛으로 떨어지는 아침 햇살, 소박한 장식의 유리창 같은 파리의 시정(詩情)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가 빚어낸 이런 파리의 이미지는 시대를 초월해 보는 이의 가슴에 향수에 젖어들게 만든다. 마치 자신이 파리시 변두리의 모퉁이 노천 카페에 앉아 방금 전 젊은이들의 키스 장면을 훔쳐본 듯한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이다. 드와노는 이렇게 타인들을 겸허하게 주목하면서 순수사진의 가장 위대한 한 시기를 엮어냈다.

출처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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